그림 114탐험관

마추픽추 걸어 보기

마추픽추를 능선 위에 붙잡아 둔 공사의 60%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땅속 기초와 배수로에 있습니다.

마추픽추 걸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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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5 구름이 걷힙니다이른 아침 위쪽 계단식 밭입니다. 구름이 갈라지며 해발 2,430 m 능선 위의 도시가 나타나고, 뒤로 와이나픽추가, 450 m쯤 아래로 우루밤바강이 보입니다. 주황색 사람은 내 키이고, 아래 막대로 시대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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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을 걷는가

마추픽추는 페루 남부 안데스산맥의 좁은 능선 위에 자리한 잉카의 도시입니다. 해발 2,430 m이고, 능선 발치를 감아 도는 우루밤바강은 450 m쯤 아래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도시를 사진 한 장으로 기억합니다. 초록 계단식 밭 위의 잿빛 돌집들, 말안장처럼 잘록한 능선, 그 뒤로 가파르게 솟은 와이나픽추입니다. 이 모형에서는 그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계단식 밭을 내려가 정문을 지나 도시의 골목을 걷고, 한 해 가운데 낮이 가장 짧은 날 해 뜰 무렵 태양 신전에 들어가고, 도시를 능선 위에 붙잡아 둔 공사 대부분이 숨어 있는 땅속까지 들어가 봅니다.

모형은 실제 산의 모양 위에 서 있습니다. 땅은 지구를 레이더로 잰 높이 자료에서, 도시의 건물과 계단과 계단식 밭의 벽은 누구나 고쳐 쓰는 세계 지도인 오픈스트리트맵에서 가져왔습니다. 그 위에서 연도 막대를 움직이면 도시가 여섯 세기를 오갑니다. 1420년경의 공사 현장, 짚 지붕과 작물이 있는 1500년경 황제의 영지, 1530년대 이후 비어 가는 도시, 1902년 골짜기의 농부가 찾아온 덤불 속 유적, 1911년 하이럼 빙엄이 왔을 때 이곳에 살던 가족들, 1912년의 정리 작업, 그리고 오늘의 보호구역입니다.

전시의 나머지는 이곳을 처음 본 사람들이 묻는 네 가지 질문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도시를 지었을까? 왜 산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았을까? 여기 살던 사람들은 하늘에 대해 무엇을 알았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아래에서 하나씩, 기술자와 고고학자와 페루 문화부가 펴낸 숫자로 답을 찾아갑니다.

처음 10초

전시는 이른 아침 위쪽 계단식 밭에서 시작합니다. 페루 문화부 1-B 경로의 전망 자리로, 가장 많이 찍는 사진이 여기서 나옵니다. 능선 둘레에 걸린 구름이 처음 몇 초 사이에 걷힙니다. 그 아래 골짜기에는 구름이 그대로 차 있고, 「구름 바다」 단추로 걷어 낼 수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주황색 사람은 내 키입니다. 전망 자리, 토레온 아래, 성스러운 바위 옆, 계단식 밭의 벽 아래에도 서 있습니다. 「나」에서 실제 키와 생일을 넣으면 키는 이 사람의 크기를 바꾸고, 생일은 나중에 태양 신전에서 쓰입니다.

도시가 앉은 자리

능선은 북쪽의 와이나픽추와 남쪽의 마추픽추 산 사이로 대략 남북으로 뻗어 있습니다. 1994년부터 이곳의 물길을 연구한 토목 기술자 케네스 라이트는 이 능선을 두 지역 단층 사이로 내려앉은 땅덩어리(지구대)라고 설명합니다. 양쪽 봉우리는 솟아오른 쪽입니다. 이 단층은 이야기에서 두 번 중요합니다. 화강암을 그 자리에서 캐낼 수 있는 덩어리로 쪼개 놓았고, 도시에 물을 댄 샘을 만들었습니다.

능선의 비탈은 가파르고, 라이트에 따르면 비는 한 해에 2,000 mm 가까이 옵니다. 이 두 가지가 마추픽추의 공학 문제입니다. 이렇게 가파른 비탈에 이만큼 비가 오는 곳의 도시라면 씻겨 내려가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고, 그 까닭 대부분은 땅속에 있습니다.

도시 둘레는 마추픽추 역사 보호구역입니다. 페루 정부가 1981년 1월 8일 만들었고, 법령에 적힌 넓이는 32,592 ha였습니다. 2015년 경계를 다시 재어 37,302.58 ha가 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1983년 이 보호구역을 문화와 자연을 함께 지닌 복합유산으로 올렸습니다. 페루 문화부의 마스터플랜은 보호구역 안의 고고 유적을 60곳으로 셉니다. 문화부가 「야크타」라고 부르는 이 도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황제의 영지

지난 세기 대부분 동안 마추픽추의 연대는 스페인 사람들의 연대기에서 나왔습니다. 연대기에 따르면 잉카의 통치자 파차쿠티는 1438년에 권력을 잡고 정복을 시작했으니, 도시는 14501460년 무렵 짓기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라이트는 파차쿠티의 영지로 시작된 때를 14301450년으로 적고, 페루 문화부의 마스터플랜도 공사가 파차쿠티 때 시작되어 투팍 잉카 유팡키와 와이나 카팍 때까지 이어졌다고 적습니다.

방사성 탄소 연대가 이 날짜를 옮겼습니다. 2021년 리처드 버거 연구팀은 도시 둘레 무덤 네 곳의 동굴에 묻힌 26명의 뼈와 이를 가속기 질량 분석으로 쟀습니다. 결과는 1420년경부터 1532년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것으로, 연대기가 말하는 파차쿠티의 즉위보다 스무 해쯤 앞섭니다. 마리우시 지우키에프스키 연구팀도 도시와 근처 두 유적, 차차밤바와 초케수이수이의 시료로 연대를 재어 옛 연대표를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시는 첫 시대를 「1420년경」, 둘째를 「1500년경」으로 부릅니다. 연대는 범위이고, 자료들은 한 해로 의견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곳이었을까요? 오늘날 말하는 도시도 요새도 아닙니다. 2023년의 유전체 연구는 이곳을 파차쿠티 황제 영지 안의 궁으로 설명합니다. 라이트는 한 해 내내 300명쯤이 살았고, 황제와 신하들이 머물 때는 1,000명까지 늘었다고 봅니다.

도시의 짜임

페루 문화부의 마스터플랜은 유적 한가운데를 남쪽의 농사 구역과 북쪽의 도시 구역으로 나누고, 도시에는 거리와 골목으로 나뉜 무리마다 방이 모두 193개 있다고 적습니다. 모형에서는 농사 구역의 위쪽 계단식 밭에서 출발해 정문으로 도시에 들어갑니다. 문화부 경로는 이 문을 「야크타 풍쿠」라고 부릅니다.

도시 안은 두 반쪽과 그 사이의 긴 빈터로 되어 있습니다. 중앙 광장은 능선 가운데를 따라 낮은 단을 쌓아 깐 넓은 잔디밭입니다. 서쪽에는 신전들이 있습니다. 주 신전과 세 창문 신전이 둘러싼 성스러운 광장이 있고, 그 위로 단을 쌓은 인티와타나 언덕이 솟아 있습니다. 동쪽에는 안뜰을 둘러싼 집들이 무리 지어 있고, 문화부가 「세 문」이라고 부르는 무리도 여기 있습니다. 정문에 가까운 남쪽 끝에는 토레온과 가장 잘 다듬은 집들이 모인 왕의 구역이, 북쪽 끝에는 와이나픽추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성스러운 바위가 있습니다.

2024년 6월 1일부터 관람객은 경로 열 개를 묶은 세 갈래 순환로 가운데 하나를 따라 걷습니다. 사람이 한곳에 몰리지 않게 하고 돌을 지키려는 문화부의 규정입니다. 2024년에는 143만 3천 명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문화부의 경로 설명은 이 모형의 자료이기도 합니다. 전시에서 「채석장」, 「물 거울」 같은 구역 이름은 문화부가 붙인 이름을 그대로 썼습니다.

계단식 밭

마추픽추의 계단식 밭은 모두 4.9 ha입니다. 빙엄은 1912년 거의 400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밭의 벽이 멀쩡한 사진을 찍었고, 라이트 연구팀은 그 까닭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흙을 조사해 보니 계단식 밭은 물이 잘 빠지게 지은 것이었습니다. 맨 아래에 돌을 깔고, 그 위에 자갈, 모래 섞인 흙, 맨 위에 겉흙을 덮었습니다. 빗물이 겉흙으로 스며들면 아래의 성긴 층이 물을 빼내므로, 흙이 벽을 밀어낼 만큼 무거운 진창이 되지 않습니다. 밭의 겉면은 계단 옆을 따라 흐르는 배수로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 있습니다.

「땅속 보기」로 계단식 밭 아래를 갈라 보고 비를 내려 보세요. 층의 순서는 라이트가 적은 대로이고, 모형의 층 두께는 잰 값이 아니라 모형 값입니다.

계단식 밭은 농사 구역에만 있지 않습니다. 라이트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좁고 가파른 단이 인티와타나 언덕과 와이나픽추 꼭대기까지 모든 비탈을 덮는다고 썼습니다. 모형에서는 유적 안의 모든 비탈을 높이 2.4 m마다 벽 하나씩, 높이 지도의 등고선을 따라 단으로 깎았습니다. 이 간격은 모형 값입니다. 오픈스트리트맵에 그려진 실제 단의 벽은 화면 구석 지도에 가는 초록 선으로 보입니다. 모형의 벽과 방향은 같지만 같은 선 위에 놓이지는 않습니다.

이 밭으로 도시를 먹여 살렸을까요? 라이트 연구팀은 기후와 흙으로 밭에서 날 수 있는 양식을 계산했습니다. 답은 한 해 55명쯤 먹일 양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한 해 내내 300명쯤 살았으니 먹을거리는 아래 우루밤바강 범람원과 더 먼 곳에서 올라왔어야 합니다. 계단식 밭은 도시를 먹이기보다 도시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공사의 60%는 땅속에

라이트의 연구를 읽은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 남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마추픽추의 공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며, 건축 노력의 60%가 기초와 땅속 배수라는 모습으로 땅 아래에 있다는 문장입니다. 이 숫자는 노력을 어림한 값이지 돌의 부피를 잰 값은 아니지만, 유적을 보는 눈을 바꿉니다. 보이는 것이 작은 쪽입니다.

중앙 광장에 판 시험 구덩이가 그 뜻을 보여 줍니다. 잔디 아래에 흙, 모래 띠, 이전의 벽, 그리고 돌을 다듬다 나온 화강암 부스러기를 배수용으로 두껍게 깐 층이 나왔습니다. 잔디 아래의 광장은 거대한 배수 밭입니다.

도시의 벽에는 정식 배수구가 129개 뚫려 있습니다. 라이트는 이것이 그냥 벽에 난 구멍이 아니라, 짚 지붕과 다져진 땅에서 흘러나오는 빗물에 맞춰 크기를 정하고 안쪽 바닥 높이에 맞춰 낸 구멍이라고 강조합니다. 가장 큰 공사는 큰 배수로입니다. 농사 구역과 도시를 가르는 도랑으로, 지질 단층을 따라 흐릅니다. 모형에서는 정문 근처에서 능선 동쪽으로 내려갑니다.

「땅속 보기」로 집 벽 옆의 땅도 갈라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벽 아래에 기초 돌과 돌 부스러기 층이 있습니다. 두께는 이번에도 모형 값이고, 60%는 라이트의 추정입니다.

샘과 수로와 샘터 열여섯 개

물은 마추픽추 산 북쪽 비탈의 샘에서 왔습니다. 라이트 연구팀은 마추픽추 단층이 그곳의 화강암을 부수어 샘이 생겼고, 잉카 사람들이 물을 더 얻으려고 모으는 장치를 지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비탈에 물이 스며드는 돌벽을 박고 그 뒤에 물을 모으는 도랑을 팠습니다. 샘물은 철에 따라 분당 23~125 L가 나왔고, 단층을 통해 샘에 물을 대는 범위는 눈에 보이는 비탈보다 절반쯤 넓다고 어림했습니다.

샘에서 길이 749 m 수로가 3%쯤의 고른 기울기로 산허리를 따라 흐릅니다. 다듬은 돌로 만든 물길의 단면은 보통 13 × 12 cm로, 분당 300 L까지 흘릴 수 있어 샘물이 보통 흘리는 양의 두 배가 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높이 4 m 벽이 받친 좁은 단 위를 지납니다. 모형의 수로는 1번 샘터에서 높이 지도를 따라 749 m를 거슬러 올라가게 그렸습니다. 모형의 경로이고, 그 끝이 실제 샘 자리와 꼭 같지는 않습니다.

수로는 해발 2,437 m의 1번 샘터에서 끝납니다. 태양 신전과 왕의 거처 입구 바로 옆입니다. 라이트는 여기서 따라 나오는 결론을 짚습니다. 왕의 거처에 사는 사람이 맑은 샘물을 가장 먼저 썼고, 수로가 지나는 선이 왕의 거처와 도시의 나머지 자리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1번 샘터에서 물은 계단을 따라 콘도르 신전 쪽으로 열다섯 개 샘터를 더 지나 떨어집니다. 샘터는 분당 10~100 L의 물에 맞춰 설계했고, 100 L가 넘으면 4번 샘터의 조절 구멍이 남는 물을 계단으로 흘려보냅니다. 물꼭지는 아리발로라는 흙 물항아리를 대고 채우기 좋게 깎았습니다. 마지막 16번 샘터는 높은 담 안에 있고 콘도르 쪽에서 들어갑니다. 그 아래로는 아무도 물을 마시지 않으니 배수로가 바로 수반으로 이어집니다.

연도 막대가 물이 흐르던 때(1500년경, 1902년, 1911년, 오늘)를 가리키면 샘터의 물줄기가 움직입니다. 1911년에도 물이 흐르는 것은 이곳에 살던 가족들이 아직 흐르던 잉카 수로의 물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채석장과 화강암

도시는 제 채석장 위에 앉아 있습니다. 서쪽 신전들과 정문 근처 집들 사이에 깨진 화강암 바위가 널린 자리가 있고, 문화부 경로는 이곳을 채석장 구역이라고 부릅니다. 이 화강암은 빌카밤바 저반이라는 큰 화강암 덩어리의 일부로, 문화부 1-B 경로가 위쪽 단에서 가리켜 보여 줍니다.

쇠 연장 없이 화강암을 어떻게 다듬을까요? 여러 해 잉카 채석장과 벽을 연구한 건축가 장피에르 프로첸이 직접 알아보았습니다. 돌은 무너져 내린 바위 더미에서 고르거나 지렛대로 바위벽에서 떼어 냈고, 다듬는 연장은 망치돌이었습니다. 다듬는 돌보다 단단한 강자갈입니다. 그는 망치돌만으로 두드려 잉카의 돌 겉면을 그대로 만들어 냈고, 그가 다듬은 돌의 두드린 자국은 실제 벽의 자국과 같았습니다.

「1420년경」에서는 채석장의 일꾼들이 돌을 나르고 두드리며, 바위들 사이에 반쯤 다듬은 돌이 놓여 있습니다.

칼날이 안 들어가는 이음매

마추픽추에서 가장 잘 쌓은 벽은 돌끼리 너무 꼭 맞아 이음매에 칼날을 밀어 넣을 수 없습니다. 프로첸은 잉카 석공술에 관한 글을 이 말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의 연구가 보탠 것은 이음매 뒤에 무엇이 있느냐였습니다. 꼭 맞는 곳은 벽의 겉면을 따라서입니다. 그 뒤로는 돌의 맞댄 면을 깎아 물려서 돌마다 테두리만 이웃 돌에 닿습니다. 안쪽 틈은 메웠습니다. 17세기 연대기 작가 베르나베 코보는 겉면에서는 돌을 그냥 맞대었지만 안쪽 틈은 끈끈한 붉은 진흙으로 채웠다고 썼습니다.

맞춤은 되풀이해서 만들었습니다. 이미 쌓은 돌 위에 돌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 올리고, 닿았던 자국으로 드러난 높은 곳을 두드려 깎아 내기를 돌이 자리 잡을 때까지 거듭했습니다.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비밀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돌 실험실」에서 칼날을 넣어 볼 수 있습니다. 다듬은 돌을 고르고 칼날을 밀면 바로 막힙니다. 막돌을 고르면 돌 사이 진흙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위에서 보기는 이음매의 겉면과 그 뒤의 빈틈을 보여 줍니다. 칼날이 들어가는 깊이는 그림이며 잰 값이 아닙니다. 도시에서는 토레온의 꼭 맞는 이음매가 숨은 볼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추픽추의 벽 대부분은 다듬은 돌이 아닙니다. 집과 계단식 밭은 거친 막돌로 쌓았고, 다듬은 돌은 신전과 왕의 구역에 썼습니다. 모형도 두 가지에 다른 돌 무늬를 씁니다.

문, 벽감, 벽의 기울기

문을 지나 뒤돌아보세요. 문은 위가 아래보다 좁습니다. 안쪽 벽의 벽감도 같은 사다리꼴입니다. 라이트는 잉카의 건물 무리, 건물 하나하나, 문과 벽감이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도 같은 모양과 양식과 간격을 따른다고 적었고,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고르게 기우는 벽의 기울기가 벽을 받쳤다고 보았습니다.

모형은 지도의 모든 건물을 같은 규칙으로 그립니다. 두께 75 cm쯤의 안으로 기운 벽, 비탈 아래쪽을 향한 사다리꼴 문 하나, 안쪽 벽의 사다리꼴 벽감들, 잉카 시대에는 박공 짚 지붕입니다. 이 규칙은 모형입니다. 실제 문과 벽감과 창이 모두 모형이 둔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다.

지진

페루에는 큰 지진이 납니다. 앞바다의 섭입대에서도, 안데스 안쪽의 단층에서도 납니다. 잉카의 벽은 흔히 지진에 끄떡없다고 하고, 사다리꼴 문과 기운 벽을 그 까닭으로 듭니다. 연구가 말하는 바는 이야기보다 조심스럽습니다.

2020년 미겔 앙헬 로드리게스파스쿠아 연구팀이 마추픽추의 지진 피해를 처음으로 연구해 발표했습니다. 태양 신전, 주 신전, 세 창문 신전에서 밀린 돌, 깨진 모서리, 원래 맞물렸던 돌 사이의 틈 같은 변형 흔적 142개를 기록했습니다. 비탈이 천천히 미끄러져 생긴 효과를 걸러 내고 나니 땅이 움직인 방향이 북동 20°와 110° 두 갈래로 남았고, 연구팀은 도시를 짓는 동안 큰 지진이 적어도 두 번 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세 문 구역의 한 벽에서는 밀린 돌이 꼭 맞게 쌓은 첫 공사 단계에 속하고, 그 위의 더 거친 돌로 쌓은 둘째 단계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공사는 지진 뒤에 더 값싼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2022년 쿠스코 둘레의 잉카 유적을 다룬 다른 연구팀은, 학자들이 오래 잉카 석조를 지진에 견디는 지식의 산물로 여겼지만 실제로 지진에 어떻게 버티는지 실험한 연구는 아주 적다고 지적합니다. 전시도 그 선을 따릅니다. 「지진」 단추는 연구가 찾은 두 방향으로 화면을 흔들 뿐, 벽을 지진에 맞춰 설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반전 카드 하나가 설명합니다.

태양 신전

토레온, 또는 태양 신전은 왕의 구역 위의 둥근 건물입니다. 가장 잘 다듬은 돌로 쌓은 벽이 안에서 솟은 화강암 바위를 감싸고, 탑은 그 바위 위에 서 있습니다. 바위 아래로는 다듬은 돌로 꾸민 동굴이 열려 있는데, 흔히 「왕의 무덤」이라고 부릅니다. 모형은 탑을 돌 받침단 위의 둥근 벽으로 짓고, 서쪽에는 곧은 벽과 문을, 안에는 바위를, 둥근 벽에는 창 두 개를 냈습니다.

1983년 데이비드 디어본과 레이먼드 화이트는 토레온이 해를 관측하던 곳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동쪽 창이 6월 하지의 해돋이를 향하고, 하지가 다가오면 창으로 드리운 그림자가 바위에 깎은 곧은 모서리와 나란해진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별자리와 해가 머리 위를 지나는 날을 보는 데도 쓸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2020년 마리우시 지우키에프스키와 야체크 코시치우크는 탑을 레이저로 스캔해 이 제안들을 따져 보았습니다. 결론은 더 조심스럽습니다. 지은 사람들이 해의 방향에 맞춰 탑을 앉힌 것은 확실하지만, 인티마차이 동굴이나 잉카라카이 전망대처럼 관측하려고 지은 기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전 카드 하나가 이 이야기를 합니다.

적도 남쪽의 하지와 동지

북반구에서 온 관람객이 많이들 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마추픽추는 남위 13°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낮이 가장 짧은 날인 동지는 6월에 오고, 낮이 가장 긴 날은 12월에 옵니다.

전시의 「해」 판에서 어느 날짜, 어느 시각이든 고를 수 있습니다. 해의 위치는 미국 해양대기청(NOAA)이 펴낸 일반 태양 위치 공식으로 남위 13.16°, 서경 72.55°, 그리니치보다 다섯 시간 늦은 현지 시각에 맞춰 계산합니다. 그런데 해돋이는 해가 평평한 지평선을 넘는 순간이 아닙니다. 마추픽추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모형은 토레온 동쪽 창에서 보았을 때 해의 윗가장자리가 높이 지도의 실제 산 위로 올라서는 순간을 찾습니다.

모형이 계산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6월 21일 해는 현지 시각 7시 20분쯤 방위각 61°쯤에서 산 위로 올라오는데, 그때 이미 참지평선보다 14°쯤 높습니다. 평평한 지평선이라면 65° 근처에서 떴을 것입니다. 모형의 동쪽 창은 모형이 계산한 그 해돋이 방향을 향하고, 처음부터 다시 계산해도 같은 방향이 나옵니다. 그 순간 토레온 안에 서면 창으로 든 빛이 바위 위에 놓입니다. 다른 날에는 해돋이 자리가 산을 따라 옮겨 가고(「해」 판의 그래프가 한 해 동안 얼마나 움직이는지 보여 줍니다), 빛 조각은 바위 옆에 떨어지거나 아예 들지 않습니다.

「해」 판의 「내 생일」은 「나」에 넣은 날짜를 씁니다. 생일과 그날 해돋이 시각으로 맞추고 토레온 안으로 데려간 뒤, 생일 해돋이가 창의 방향에서 얼마나 벗어나는지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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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티마차이와 다른 하늘 자리

인티마차이는 잉카 사람들이 입구를 정밀한 돌쌓기와 창으로 꾸민 마추픽추의 동굴입니다. 1987년 디어본, 카타리나 슈라이버, 화이트는 이 구조물이 12월 동지 앞뒤의 짧은 동안에만 떠오르는 해의 빛을 들인다는 것을 보이고, 그 철의 잉카 의례인 카팍 라이미에 쓰였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2022년 마추픽추에서 하늘을 관측했을지 모르는 자리들을 검토한 지우키에프스키와 코시치우크도 인티마차이가 정밀 관측 기구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데 동의하며, 해와 달의 주기를 따라가는 데 썼다고 봅니다.

같은 검토는 관측 관 두 개를 갖춘 잉카라카이 전망대를 잉카 건축에서 하나뿐인 예로 보고, 플레이아데스와 금성을 보려고 지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위에 판 둥근 수반 두 개, 문화부 경로가 「물 거울」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절구는 반대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늘을 보는 데 썼다는 근거가 약합니다. 콘도르 신전, 인티와타나, 강가의 깎은 돌, 골짜기 건너편 야크타파타 유적에는 기록된 방향이 있고, 6월 하지 해돋이 쪽을 즐겨 향합니다.

모형의 인티마차이는 도시 동쪽의 바위 언덕에 있습니다. 위치는 대략이고, 창은 모형이 그 자리에서 계산한 12월 동지 해돋이 방향, 112°쯤을 향합니다. 과제 「다른 하지」에서 찾아보세요.

성스러운 광장, 주 신전, 세 창문 신전

중앙 광장 서쪽, 인티와타나 아래에 신전이 세 방향을 둘러싼 작은 광장이 있습니다. 주 신전은 큰 돌을 맞춰 쌓은 세 벽이 광장 쪽으로 열려 있습니다. 세 창문 신전은 동쪽 벽에 큰 사다리꼴 창 셋이 나 있어 중앙 광장을 내려다보고, 광장 쪽은 트여 있습니다. 주 신전 옆의 작은 건물은 지도에 「장식의 집」으로 올라 있습니다.

이 신전들에 앞에서 말한 지진의 흔적이 있고, 주 신전은 천천히 미끄러지는 비탈 위에 서 있어 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숨은 볼거리 「움직인 돌」이 여기 있습니다.

인티와타나

광장 서쪽, 단을 쌓은 언덕 꼭대기에 깎은 화강암 바위가 있고, 그 위로 짧은 기둥이 솟아 있습니다. 다른 성소처럼 여기서도 6월 하지 해돋이 방향과 맞는다는 연구가 있지만, 이 돌을 무엇에 썼는지는 아직 의견이 갈립니다. 높이 지도가 너무 성겨 언덕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모형은 언덕을 9 m 높이고 단으로 깎았습니다. 모형에서 손본 부분입니다.

성스러운 바위, 콘도르, 동쪽 집들

광장 북쪽 끝에 넓적한 바위가 낮은 받침 위에 서 있고, 한쪽이 트인 홀들이 양옆에 있습니다. 문화부 경로는 이것을 성스러운 바위라고 부릅니다. 그 너머로 길이 도시를 벗어나 와이나픽추와 그 북쪽의 큰 동굴로 이어집니다.

동쪽 집들 아래의 콘도르 신전은 모양을 보고 근래에 붙인 이름입니다. 문화부의 왕실 경로가 지나가고, 다른 성소들과 함께 방향을 잰 연구가 있습니다. 16번 샘터에는 여기서 들어갑니다.

동쪽 집들은 안뜰을 둘러싸고 무리 지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 문 무리에서 로드리게스파스쿠아 연구팀이 한 벽의 두 공사 단계를 찾았습니다.

여기 살던 사람들

누가 물을 긷고, 밭을 갈고, 집에서 살았을까요? 오랫동안 단서가 거의 없었습니다. 버거 연구팀은 연대를 잰 사람들에게 무거운 공사 일을 한 흔적이 거의 없다고 적는데, 도시가 다 지어진 뒤 시골 궁으로 쓰이던 때 이곳에 살았다는 생각과 맞아떨어집니다.

2009년 베서니 터너 연구팀은 마추픽추에 묻힌 사람들의 이에서 산소, 스트론튬, 납 동위원소를 쟀습니다. 동위원소는 사람이 어디서 자랐는지 기록하는데,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았음을 가리켰습니다. 2023년 루시 살라자르, 리처드 버거 연구팀은 왕실을 섬긴 사람들로 보이는 마추픽추의 34명과, 견주어 볼 쿠스코의 34명의 유전체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잉카 제국 곳곳과 아마존에서 왔고, 계통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1500년경」의 광장과 샘터와 밭의 마네킹들은 여러 빛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모형의 사람들은 아무도 얼굴이 없습니다.

이름

마추픽추는 도시 남쪽에 있는 산의 이름입니다.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을까요? 2021년 페루 문화부 쿠스코 지부의 도나토 아마도 곤살레스와 일리노이대학교 시카고의 브라이언 바우어는 빙엄의 현장 기록, 1911년 이전에 인쇄된 지도와 지도책, 16~17세기 토지 문서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결과는 모두 한쪽을 가리킵니다. 도시는 픽추, 더 그럴듯하게는 옆 봉우리를 딴 와이나픽추라고 불렸고, 마추픽추라는 이름은 1911년 이후 빙엄의 출판물과 함께 유적에 붙었습니다. 16세기 말의 한 문서에는 그 고장 사람들이 와이나픽추라고 부르던 마을로 돌아가 살려고 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2026년 페루 문화부 마스터플랜도 「와이나픽추라는 이름의 잉카의 옛 마을(Pueblo Antiguo del Ynga Nombrado Guaynapicchu)」이라는 옛 이름을 옮겨 적습니다.

비어 있던 시간

사람들은 언제 떠났을까요? 버거 연구팀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1532년 무렵에서 끝납니다. 1997년 라이트는 마지막으로 비워진 해를 1572년으로 적었습니다. 두 날짜가 꼭 부딪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매장과 도시의 마지막 쓰임이 같은 해일 까닭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형은 「1530~1570년대」에 지붕이 무너지고 숲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자료마다 날짜가 다르다고 적습니다.

1902년과 1911년, 잃어버린 적 없는 도시

마추픽추 이야기는 흔히 1911년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낸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골짜기 사람들은 이 도시를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페루 국영 통신사 안디나에 따르면 쿠스코 지방의 소작농 아구스틴 리사라가가 1902년 7월 14일 가비노 산체스, 엔리케 팔마, 후스토 오초아와 함께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태양 신전 벽에 이름을 적었고, 이 글씨는 나중에 지워졌습니다. 안디나는 리사라가가 그보다 먼저 1894년에도 왔을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1911년 7월 24일, 제1차 예일 페루 탐사대를 이끈 미국의 역사학 교수 하이럼 빙엄이 강가의 만도르팜파를 떠나 능선을 올랐습니다. 페루 문화부 마스터플랜은 함께 간 사람들의 이름을 적습니다. 그를 안내한 농부 멜초르 아르테아가, 그리고 민간 경비대의 파비안 카라스코 하사입니다. 꼭대기에서 이들은 남쪽 계단식 밭을 부치며 아직 흐르던 잉카 수로의 물을 마시던 두 가족, 레차르테 가족과 알바레스 가족을 만났습니다. 레차르테 가족의 소년 파블로가 덤불을 헤치고 빙엄을 건물들로 안내했습니다.

빙엄이 한 일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고, 연구팀을 꾸려 돌아와 조사하고,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안디나의 기사도 그렇게 분명히 적고, 반전 카드 「골짜기 사람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연도를 1911년으로 맞추면 밭의 가족들이 보입니다.

예일 탐사대, 그 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예일 탐사대가 덤불을 걷어 내고 도시 둘레의 무덤 동굴을 발굴했습니다. 1913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빙엄의 긴 글을 실었고, 라이트는 그 글의 한 줄, 「잉카는 훌륭한 기술자였다」를 옮겨 적습니다.

1981년 보호구역이 생겼고 1983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올렸습니다. 1994년 페루 정부가 라이트 연구팀에 공학 조사를 허가했습니다. 2010년 초에는 큰비가 보호구역을 덮쳐 아과스칼리엔테스와 산타테레사를 잇는 길이 끊겼고, 유네스코는 기술 조사단을 보내 물을 머금은 흙에서 산사태가 더 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페루 문화부는 Tuboleto 누리집에서 순환로와 경로별로 입장권을 팔고, 관람객이 묵는 골짜기의 마추픽추 마을에는 60 km 떨어진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로 갑니다.

산과 숲

도시 북쪽의 와이나픽추는 지도에서 해발 2,693 m입니다. 좁은 계단식 밭이 꼭대기까지 오르고, 북쪽 비탈에는 다듬은 돌로 꾸민 큰 동굴이 있어 3-C 경로로 갑니다. 도시 남쪽의 마추픽추 산은 1-A 경로로 오르며 오가는 길이 3.8 km이고, 문화부는 정상에서 보이는 설산으로 살칸타이와 푸마실로를 꼽습니다. 강 건너 동쪽에는 마스터플랜이 꼽은 성스러운 산 가운데 하나인 푸투쿠시가 솟아 있습니다. 모형이 딛고 선 레이더 측량은 좁은 봉우리를 뭉개어 와이나픽추를 230 m쯤 낮게 기록했으므로, 모형은 이름 있는 봉우리들을 지도에 적힌 높이로 되올렸습니다.

보호구역은 강가에서 높은 초원까지 이어집니다. 페루 자연보호구역청(SERNANP)은 이 안에서 해발 1,900 m 위의 습한 산지림부터 6,000 m가 넘는 설산까지 야생 생태계 24가지를 세고, 나무 332종, 포유류 75종, 새 444종, 나비 365종을 셉니다. 보호구역은 안경곰과 안데스바위새 같은 종을 지키려고 만들었습니다. 모형에서는 도시 바깥 비탈을 운무림이 덮습니다. 가까운 나무는 자세히, 먼 나무는 단순한 모양으로 그리고, 500 m쯤 너머의 숲은 땅의 빛깔로 칠했습니다.

모형을 만든 방법

땅은 우주왕복선 레이더 지형 측량(SRTM) 높이 자료를 아마존 웹 서비스의 공개 자료 목록에 있는 Terrain Tiles로 다시 표본한 것으로, 도시 근처는 9 m쯤, 먼 곳은 75 m 간격입니다. 이 자료에서 도시는 해발 2,437~2,440 m쯤으로 나와 공식 높이 2,430 m와 10 m 안쪽으로 맞습니다. 높이 자료는 매끈하므로 모형은 세 가지를 보탰습니다. 이름 있는 봉우리를 오픈스트리트맵 정상점의 높이로 되올렸고, 인티와타나 언덕을 높이고 중앙 광장을 몇 미터 낮췄으며, 고고 유적 경계 안의 땅을 높이 2.4 m마다 단으로 깎았습니다.

건물은 오픈스트리트맵에 유적으로 올라 있는 평면 92개를 앞에서 말한 규칙으로 벽으로 세운 것입니다. 토레온, 세 창문 신전, 인티와타나, 성스러운 바위, 콘도르는 지도에 적힌 자리에 손으로 지었습니다. 계단은 오픈스트리트맵에서 가져왔고, 지도에 계단이 없는 단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벽을 따라 24 m쯤마다 계단을 더했습니다.

계단을 따라 늘어선 샘터 열여섯 개의 자리와 수로의 경로는 라이트의 설명을 따랐지만 모형이 그린 것입니다. 계단식 밭과 기초의 층 두께, 벽의 높이, 짚 지붕, 나무, 사람은 모형에서 고른 값입니다. 전시의 문장이 숫자이면 출처를 달았고, 모형 값이면 그렇다고 적었습니다.

해는 NOAA 공식으로, 지평선은 해가 있는 쪽으로 7 km까지 높이 자료를 재어 구합니다. 모든 것을 브라우저에서 그립니다. 돌과 짚의 무늬는 페이지가 열릴 때 코드로 칠하고, 프로그램과 자료 말고는 내려받는 것이 없습니다. 지도 자료 © OpenStreetMap contributors, ODbL.

실제와 다른 점

  • 계단식 밭의 벽은 9 m 간격 높이 자료의 등고선을 따라 높이 2.4 m마다 하나씩 그렸습니다. 실제 단은 잉카 사람들이 쌓은 자리에 있고, 지도에 견주어 보도록 가는 선으로 그렸습니다.
  • 건물은 평면에서 벽, 문, 벽감을 같은 규칙으로 세웠습니다. 실제 문과 창과 벽감이 모두 모형이 둔 자리에 있지는 않고, 벽 높이도 더 높거나 낮은 곳이 많습니다.
  • 지붕: 잉카 시대에는 모형의 모든 건물에 박공 짚 지붕을 얹었습니다. 오늘날 유적에서 짚 지붕을 다시 얹은 건물은 몇 채뿐이고, 어느 건물인지는 모형이 골랐습니다.
  • 수로의 경로와 그 끝은 길이와 기울기를 맞춘 모형 경로입니다.
  • 인티마차이 동굴의 자리는 대략입니다.
  • 산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어 벼랑과 봉우리 모양이 실제보다 단순합니다.
  • 사람은 얼굴 없는 마네킹이고, 수와 자리는 시대를 보여 주는 스케치이지 인구 조사가 아닙니다.

돌아다니는 방법

WASD나 화살표 키로 걷고 끌어서 둘러봅니다. 휴대폰에서는 왼손 엄지로 걷고 오른손 엄지로 둘러봅니다. 바닥을 누르면 그리로 걸어갑니다. 계단식 밭의 벽은 너무 높아 그냥 오를 수 없습니다. 단마다 계단이 있고, 벽에 막히면 「너무 높습니다. 계단을 찾으세요」가 뜹니다. 「뛰기」는 세 배 빠르고, 「하늘에서」는 140 m 위로 올라 능선을 내려다보며, 지도를 누르면 그리로 날아갑니다. 위쪽 단추로 전망 자리, 중앙 광장, 태양 신전, 인티와타나, 성스러운 바위로 바로 갑니다.

아래쪽 막대는 연도를 바꿉니다. 「해」 단추는 날짜와 시각 판을 열고, [와 ] 키는 시각을 15분씩 옮깁니다. R은 비, C는 구름을 켜고 끄며, G는 도감, M은 큰 지도, T는 과제, F는 숨은 볼거리, P는 사진 모드입니다.

과제, 숨은 볼거리, 카드

과제 13개는 답을 고르거나 모형 안에서 무언가를 해 보라고 합니다. 6월 하지 빛을 바위 위에 놓기, 인티마차이에서 12월 해돋이 찾기, 이음매에 칼날 넣기, 계단식 밭 속으로 빗물이 빠지는 모습 보기, 1911년의 가족들 찾기 같은 것입니다. 숨은 볼거리 21개는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열리고, 어떤 것은 특정 시대에만 있습니다. 반전 카드 9장은 그 자리에 가거나 실험을 하면 뒤집힙니다. 도감에는 볼거리 118가지가 출처와 함께 실려 있고, 본 것을 기억합니다. 모두 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마추픽추는 얼마나 높은 곳에 있나요?

유네스코와 페루 문화부는 도시의 높이를 해발 2,430 m로 적습니다. 케네스 라이트는 우루밤바강보다 450 m쯤 높다고 봅니다. 모형의 높이 자료에서 중앙 광장은 해발 2,437 m쯤입니다.

마추픽추는 언제 지었나요?

스페인 연대기는 1438년쯤 권력을 잡은 파차쿠티 황제와 이곳을 잇습니다. 도시 둘레에 묻힌 사람들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1420년경부터 1532년까지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 주므로, 공사는 1420년대나 그 뒤 얼마 안 되어 시작했을 것입니다. 정확한 해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마추픽추에는 누가 살았나요?

황제의 영지였습니다. 케네스 라이트의 추정으로 한 해 내내 300명쯤 살았고, 황제가 오면 1,000명까지 늘었습니다. 이곳에 묻힌 34명의 유전자는 잉카 제국 곳곳과 아마존 계통을 보여 주며, 대부분 왕실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마추픽추는 1911년까지 잊혀 있었나요?

아닙니다. 골짜기 농부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구스틴 리사라가가 1902년 벽에 이름을 적었고, 1911년에는 두 가족이 살며 밭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그 고장 농부가 하이럼 빙엄을 데리고 올라왔고, 한 가족의 소년이 유적까지 안내했습니다. 빙엄은 이곳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잉카 사람들은 이 도시를 뭐라고 불렀나요?

2021년 지도와 토지 문서를 견준 연구에 따르면 아마 와이나픽추, 또는 그냥 픽추였습니다. 마추픽추는 도시 남쪽 산의 이름이고, 빙엄의 출판물과 함께 유적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잉카 사람들은 돌을 어떻게 그렇게 꼭 맞췄나요?

맞춰 보고 두드리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돌을 이웃 돌 위에 놓았다가 들어 올리고, 높은 곳을 더 단단한 망치돌로 두드려 깎기를 돌이 자리 잡을 때까지 거듭했습니다. 꼭 맞는 곳은 벽의 겉면뿐이고, 그 뒤로는 돌을 깎아 물리고 틈을 진흙으로 메웠습니다.

잉카 사람들은 회반죽을 썼나요?

잘 다듬은 벽의 겉면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겉면 뒤의 틈은 17세기에 베르나베 코보가 적은 대로 끈끈한 진흙으로 메웠습니다. 집과 계단식 밭의 거친 벽은 막돌입니다.

마추픽추는 왜 산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았나요?

공사 대부분이 땅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케네스 라이트는 건축 노력의 60%가 기초와 배수라는 모습으로 땅 아래에 있다고 추정합니다. 층을 쌓은 계단식 밭, 돌 부스러기 층, 배수구 129개, 단층 위의 큰 배수로가 그것입니다.

물은 어떻게 마추픽추까지 왔나요?

마추픽추 산의 샘이 길이 749 m, 단면 13 × 12 cm쯤의 수로로 물을 보내고, 수로는 계단을 따라 늘어선 샘터 열여섯 개로 이어집니다. 샘에서는 분당 23~125 L가 나오고, 수로는 분당 300 L까지 흘릴 수 있었습니다.

계단식 밭이 도시를 먹여 살렸나요?

일부만 그랬습니다. 케네스 라이트 연구팀은 4.9 ha의 계단식 밭이 한 해 55명쯤 먹일 양식을 냈다고 계산했습니다. 나머지는 골짜기에서 날라 왔습니다.

마추픽추는 지진에 끄떡없나요?

벽은 지진에 상했습니다. 2020년 연구는 신전 세 곳에서 공사 중에 온 큰 지진 두 번 이상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잉카의 벽은 흔히 지진에 강하다고 하지만 실험한 연구는 적습니다.

하지에 태양 신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나요?

적도 남쪽의 동지인 6월 하지 해 뜰 무렵, 토레온 동쪽 창으로 든 빛이 안의 바위 위에 놓입니다. 모형에서 그 날짜와 시각으로 맞추고 안에 서 볼 수 있습니다.

토레온은 천문대였나요?

데이비드 디어본과 레이먼드 화이트가 1983년에 그렇게 제안했습니다. 2020년에 발표된 3D 측량은 탑이 해의 방향에 맞춰 지어졌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관측하려고 지었다는 데는 의문을 품으며, 그 역할은 인티마차이 동굴이 더 잘 맞는다고 봅니다.

왜 동지가 6월인가요?

마추픽추는 적도 남쪽, 남위 13°에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낮이 가장 짧은 날이 6월에, 가장 긴 날이 12월에 와서 한국이나 유럽, 북아메리카와 반대입니다.

마추픽추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나요?

페루 문화부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2024년에 143만 3천 명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2024년 6월 1일부터는 경로 열 개를 묶은 세 갈래 순환로로 관람합니다.

이 모형은 마추픽추를 그대로 옮긴 것인가요?

아닙니다. 땅과 건물 평면은 실제 자료이고 봉우리와 신전은 지도에 적힌 자리에 있지만, 계단식 밭의 선, 벽 높이, 지붕, 수로의 경로, 사람은 모형입니다. 「실제와 다른 점」에 차이를 적었습니다.

용어

  • 야크타(llaqta): 마을이나 도시를 뜻하는 케추아어로, 페루 문화부가 잉카 도시 마추픽추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 토레온: 태양 신전의 둥근 탑입니다.
  • 벽의 기울기: 벽이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우는 것입니다.
  • 다듬은 돌쌓기: 겉면을 따라 꼭 맞춘 다듬은 돌로, 신전과 왕의 집에 썼습니다.
  • 막돌 쌓기: 거친 돌을 진흙으로 쌓은 것으로, 집과 계단식 밭 대부분에 썼습니다.
  • 지구대: 두 단층 사이로 내려앉은 땅덩어리입니다.
  • 아리발로: 물을 나르는 목이 좁은 흙항아리입니다.
  • 하지와 동지: 해가 가장 북쪽이나 가장 남쪽에서 뜨는 날입니다. 마추픽추에서는 6월 하지가 낮이 가장 짧은 동지입니다.
  • 방위각: 북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잰 방향의 각도입니다.
  • 왕실을 섬긴 사람들: 왕실 살림을 맡아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 AMS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가속기 질량 분석기로 탄소-14 원자를 세어 생물 시료의 나이를 재는 방법입니다.
  • SRTM: 2000년 우주왕복선이 레이더로 지구 표면의 높이를 잰 사업입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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